정격유착의 폐해와 부마민주항쟁
김영상 제명 사건이 일어나자 10월 16일 오후 7시 5만명에 이르는 시위 인파가 부산시청 앞과 광복동 일대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신 철폐’,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는 구호들이 터져 나왔다. 새벽 한시까지 파출소 11곳을 부수고 박정희의 사진을 꺼내 불태우는 등 시민항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박정희는 부산지역에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렇게 부산지역의 민주항쟁은 진압되었으나 마산에서는 그 항쟁의 불길이 확산되고 있었다. 19일 저녁까지 노등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해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조짐이 보였고, 박정희는 20일을 기해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마산항쟁도 진압된다.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난 이유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이유는 김영삼 총재의 제명과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의 폐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정권의 정격유착과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말하자면 장황하다. 하지만 일단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하여 부산과 관련에 경제적 문제의 한 사례를 보자.
“부마사태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 것이 부가가치세 등 세금의 과중징수였다. 부산 지역의 경우, 1979년에 시민들이 낸 세금은 약 3,880억 원으로서 1978년보다도 무려 32퍼센트가 늘어났다. 이 세금과중은 보수적인 부산 중심지 상인들까지도 반정부 쪽으로 돌려놓아 부산사태의 확산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김재규와 10.26으로
부마사태가 일어났을 때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박정희의 명령을 받고 부산에 직접 내려가 사태를 확인했었다. 김재규는 단순히 학생 몇 십명이 선동하여 일어난 봉기라고 착각한 채로 부산에 내려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리어 학생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시위대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심각성을 박정희와 그 간부들에게 알렸으나, 박정희는 불쾌해 했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 라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의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10·26사건 주요 관련자들의 변호인으로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봤던 안동일 변호사의 회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어요.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요. 차지철도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어요.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본인도 ‘옛날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하니까…. 더 큰 국민의 희생을 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막자는 거였죠.”
민주적 열사로서 바라본 김재규
5월 16일 쿠데타 이후 쭉 대통령을 해오던 박정희는 71년 대선에서 위기를 겪는다. 3선 개헌과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반대구호를 외치는 김대중의 유세에 압박을 느낀 것이다. 박정희는 선거 유세에서 마지막 집권을 국민들에게 내세웠고, 결과는 박정희의 당선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지막 집권을 제안한 것이 김재규 였다는 사실이다. 이후, 박정희가 72년 10월 유신헌법을 세우고 영구집권의 의지를 세웠을 때도 심한 불쾌감을 표시했던 김재규의 태도 또한 같은 대목이다.
김재규가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는 사실은 재판에서의 주장, 민족 운동가인 장준하와의 접촉, 윌리엄 클락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 등 여러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26이후의 정세, ‘안개정국’과 ‘서울의 봄’ 그리고 제 5 공화국
10.26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로 넘어갔다.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는다. 이후 정국은 전두환의 등장으로 큰 전환을 맞는다. 10.26 사건이 일어난 직후 YWCA위장 결혼식과 12.12 사태, 4.14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임명, 5.17 쿠데타까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 많은 사건들의 중심에는 ‘하나회’라는 군부내의 조직이 있었고, 이들의 정권찬탈의 음모하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는 등의 신군부 세력의 군부 장악.
1980년 2월 29일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조치가 발표. 김대중의 사면복권으로 3김의 대권경쟁이 본격화.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 부장 서리를 겸임.
5월부터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정치문제를 거론하고 나옴. 전국의 대학들은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정부주도개헌 중단’을 슬로건을 내걸었음.
5월 9일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은 임시국회소집과 정부의 개헌작업 중지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
5월 15일 공화당과 신민당이 총무회담을 열어 20일 국회를 열기로 합의.